세카
 
아직은 쌀쌀한 초봄, 말다툼 이후 생각 정리가 필요하다며
 
각자 시간을 갖자고 본가로 향했던 최찬영은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때마침 울리는 핸드폰엔ㅡ
 
라며 명료한 연락이 끝입니다.
 
천영이:(한참 휴대폰 화면만 응시한다. 이어 단축번호를 누른다. 최찬영이 전화를 받을까.)
 
수신호가 연결되기를 반복하다 이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천영이:(기계음이 저절로 꺼질 때까지 넋 놓고 허공 응시했다. 혈관이 역류할 것만 같다⋯. 간극. 문자 남긴다. '영원히 안 볼 거야?')
 
1분,
 
2분,
 
그리고 10분.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는 답장은 없네요.
 
천영이:
지능
기준치: 50/25/10
굴림: 80
판정결과: 실패
 
분명 시간을 갖자며 향했던 곳이 있었는데···
 
어디였을까요?
 
천영이:(기억을 되짚어본다. ⋯사소한 흔적이라도 남은 게 없을까?)
 
마지막 대화를 되짚어보자.
 
같이 사는 게 지겹다고 했던가.
 
그래서 본가로 가 생각 정리 좀 하고 다시 돌아오겠다 했던 것이 떠오른다.
 
천영이:(존재의 미래 여부에 은닉당할 바에야⋯ 대강 잡히는 최찬영 물건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 (한참을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렇게 서있더니 충동적으로 현관문 열어젖힌다. 최찬영이 있을 곳을 목적지로 하여 발걸음 옮긴다.)
 
위치를 특정하고 나면 직접 방문하기 위해 문밖을 나섭니다.
 
집을 나서자 머리 위로 옅은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합니다.
 
한겨울 만큼은 아니지만 조금 추운 기분이 드네요.
 
꽃이 피기에도 이른 봄입니다.
 
천영이는 최찬영의 본가로 향합니다.
 
알 수 있는 정보를 겨우 더듬어 근방에 도착합니다.
 
길이 정돈되어 있지 않고 나무가 많아 헤매기가 쉽네요.
 
천영이:
기준치: 60/30/12
굴림: 51
판정결과: 보통 성공
 
해가 지기 전 마을 어귀에 도착합니다.
 
마을로 가는 길에는 강물이 흐르고,
 
적당한 언덕 위에 나무로 된 다리가 있습니다.
 
다리는 밟으면 삐걱이는 소리가 나지만 튼튼해 보이네요.
 
계속해서 내리는 비 탓에 강물이 조금 불어나 있습니다.
 
빗속에서 오래 걸은 천영이 역시 체온이 떨어져 추워지기 시작합니다.
 
천영이: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48
판정결과: 보통 성공
 
강 건너 검은 우산을 쓴 사람이 서있는 것이 보입니다.
 
묘하게 고집스런 시선.
 
허나 자세히 보아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천영이:(⋯⋯?)
 
여하튼 마을에 온 것까지는 좋았으나,
 
최찬영의 행방을 알 수 없으니 이제부터라도 찾아봐야 하기에 숙소부터 잡는 것이 현명한 선택 같네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다리를 건너면,
 
그 건너편의 검은 우산을 쓴 인영이 무사히 다리를 건너는 것을 기다려줍니다.
 
ㅡ : 저, 안녕하세요.
천영이ㅡ 씨 맞으시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쪽이 먼저 말을 걸어옵니다.
 
애진작 당신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천영이:(적당히 고개만 숙였다가 들었다.) ⋯저를 아세요?
 
ㅡ : 그럼요. 저는······
 
천영이: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53
판정결과: 보통 성공
 
퍽 호의적인 것 같아 보여요.
 
양민지: (고개 숙여 인사한다.) 반가워요. 저는 양민지라고 해요. 찬영 씨 앞으로 오신 거 맞으시죠?
 
천영이:안, ⋯녕하세요. (낯선 사람에게서 네 이름을 듣는 건 생소한 기분이라.) 어떻게 아셨어요?
 
양민지: 음, 그건 이따 말씀드릴게요. 비가 많이 오네요. 찾으시는 분도 근처에 있으니 같이 가요. 천영이 씨를 위해 마중 나왔거든요.
 
자신을 양민지라 소개한 여자는 천영이의 옷깃을 끌고,
 
조용한 마을의 거를 걸어 2층 단독 주택에 도착합니다.
 
우산을 접고 자연스레 문을 열며 안으로 들입니다.
 
양민지: 찬영 씨! 저 왔어요.
 
안으로 들어가 우산을 접고 우산통에 넣고 있으면,
 
안 쪽에서 사람이 나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들리는 목소리는 최찬영의 목소리네요.
 
안쪽에서 보이지 않는 담소가 쭉 이어집니다.
 
사람을 이렇게 문전박대하고 말이에요.
 
곧 두 사람치의 발걸음 소리가 현관까지 닿습니다.
 
현관에 도착한 최찬영은 천영이를 바라봅니다.
 
그에 상응하듯 앞에 있는 작자를 응시하면ㅡ
 
최찬영:안녕. 오랜만이네.
 
한참 나이를 먹은 얼굴입니다.
 
대략 10년은 지나보이네요.
 
최찬영:어째 시간이 지나도 넌 여전하게 생긴 것 같다.
 
양민지: 그래요. 어서 들어오세요.
 
천영이:(요지부동이다. 발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이해가⋯. ⋯⋯설명 좀 해.
 
최찬영:뭐가?
 
양민지: 비를 많이 맞으셔서 그런가··· 어디 아프세요?
 
이러나 저러나 최찬영 일동은 그러한 천영이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입니다.
 
최찬영:밥은 먹었나? 나이를 먹긴 했나 봐. 나도 이제 요리가 늘긴 했어.
먼 길까지 왔는데 끼니라도 제대로 챙겨 먹어야지. 뭣하면 식사 준비할 때까지 씻고 와도 돼. 옷 정도는 빌려줄 테니까.
 
천영이:전혀 대화가 안되는 기분이야. 내가 기억을 상실하기라도 했나? 아니면 또, ⋯⋯내 머리가 나빠서⋯. (수벽에 잔류하는 체온조차 차게 식어가는 감각이 일었다. 타개 방안을 찾기 위해 입을 달싹이는 시도가 있었으나, 이내 함구한다.)
(⋯미처 우산으로 막지 못했던 빗물이 발목을 타고 바닥으로 뚝 떨어진다.) 최찬영.
나한테 화난 거 아니지?
 
최찬영:나도 비슷한 감상이야. (눈앞의 상대의 혼란을 이해할 방도 따윈 없다. 떨어지는 빗물을 응망한다. 장시간의 침묵. 현관 안 협탁에 쌓아진 옷가지들을 우악스럽게 품에 안긴다.) 나는 화가 나지 않았고, 네가 내게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어. 씻고 와. 욕실은 왼쪽 귀퉁에 돌면 바로 있어.
 
천영이:(별 다른 저항 없이 옷가지들을 받는다. 꿈을 꾸는 것이라고 착각할 만큼 현실성이 없다. 천천히 욕실 쪽을 향해 몸을 돌린다. 발걸음을 떼기까지 몇 초.) 아까 그 여자 말이야. ⋯⋯사랑해?
 
최찬영:글쎄⋯⋯ 아마 그런 거겠지. 살면서 사랑이란 거 수도 없이 정의하면서 살아오잖아. 태어나 당연히 엄마, 아빠. 학교 갈 무렵엔 선생님과 친구들. 대가리 크면 여자친구, 남자친구. (목소리는 격양되지 않고 숫제 덤덤했다.) 인연법에 의거해서 사람 만날 때마다 그 관계가 무엇이든 사랑은 이런 거다, 정의하기 바쁘지. 그렇다면 난 저 여자를 사랑하는 게 맞아.
젖은 채로 방치하면 감기 걸려. 회포는 나중에 풀고 샤워부터 해.
 
천영이:그랬구나.
⋯네 다정한 목소리를 들어보는 건 간만이라. (달칵. 그 말을 끝으로 욕실 안에 들어가 문을 닫는다.)
 
 
짧은 목욕을 하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나요?
 
천영이:(무슨 정신으로 샤워기나 제대로 잡았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들려준 옷으로 대강 갈아입고 나온다.)
 
천영이가 씻고 나오면, 주방에서는 상기된 듯한 대화가 얼핏 들립니다.
 
양민지: 그래도, 찬영 씨 입맛이 달라져서 다행이에요. 거진 10년 전까지만 해도 제가 만드는 음식은 아예 먹지 않으려 했잖아요.
 
최찬영:그때야 뭐······ 음식을 가려서 그렇지. 지금은 네가 만드는 음식이 아니면 안 되기도 하고.
누군가 애정을 담아 만들어주는 음식이 맛 없을 리 없잖아.
 
양민지: 후후! 말만이라도 영광이네요.
 
뒤늦게서야 천영이의 등장을 알아차린 두 사람은 짧게 시선을 교환하고,
 
적당히 넓은 식탁 위로 안내합니다.
 
식탁 위에는 로스트 비프와 매쉬드 포테이토, 버터를 발라 굽고 치즈를 뿌린 옥수수 등이 차려져 있습니다.
 
평소에 보던 것과는 제법 대른 모양새에요.
 
최찬영:와서 먹어.
 
천영이:(말없이 의자를 끌어 최찬영 맞은편에 앉는다.) ⋯⋯와, 이걸 다 직접 만드셨어요?
 
양민지: 간만에 손님이 오셔서 실력 발휘를 좀 했죠. 입에 맞으실까 모르겠네요. (먹기까지 얌전히 기다린다.)
 
천영이:⋯온다고 연락한 적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아셨어요? (속이 울렁거려서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묘하게 몸을 돌려 최찬영과의 마찰을 피한다.)
 
양민지: 음, 그건 비밀이랍니다. 다 알려드리면 재미없겠죠?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 천영이를 향해 입 연다.) 두 분은 친구인 건가요? 그이를 찾아오는 사람은 천영이 씨밖에 없어 의외라서요. 꽤 먼 길이잖아요.
 
천영이:(모든 혈관이 역류할 정도로 박동이 거세지는 것 같다. 미어질 동맥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그랬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요. (포크만 그릇 위에서 휘적거린다.) 찬영아, 우리 친구였던가?
 
최찬영:(굳은 표정 여과 없이 드러났지만 바로 표정을 갈무리하고 입꼬리를 말아올린다.) 아마도? 교우, 급우, 동창⋯ 나아가 생사결을 함께한 전우? 그런 거였지.
 
양민지: 아, 들었던 것 같아요. 두 분 모두 고된 학창 시절을 보냈다는 거 말이에요. 안부가 궁금해서 찾아오셨지요?
그렇다면 간략하게나마 설명해 드리는 것이 맞을 것 같아서요. (최찬영의 동의를 구하듯 눈짓한다.)
 
최찬영:알아서 해.
 
여자는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양민지: 저희는 10년 전 쯤 처음 만났어요. 찬영 씨가 이 마을에 자리 잡을 때까지 제가 옆에서 많은 일을 보필했죠.
당시 찬영 씨는 위태로워서 제가 옆에서 간병했어요. 그때부터 사이가 발전해서, 몇 해전에 결혼했답니다.
 
천영이:(횡경막의 무의식적인 수축과 경련이 잠시 일었다. 반사적으로 제 입을 막고 콜록거린다.) ⋯결혼이요?
최찬영은 당장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우리집에⋯⋯. (대화가 빙빙 돈다. 측량할 수 없는 심연으로 추락하는 것만 같다.) 저기, 둘이서 저를 놀리고 있는 건 아니시죠. 찬영이가 제 욕 많이 했어요?
⋯이제 지겨우니까 장단을 맞춰달라고⋯⋯.
 
최찬영:그만. 결혼한 거 맞아. 시답지 않은 소리 할 거면 와이프 올라가고 나서 해. 자고 갈 거지? (여자를 향해 턱짓한다.) 2층에 손님방 정리 해놨어?
 
양민지: 제법 흥미로운 얘기들이네요. (여전히 미소 지은 채 고개 주억거린다.) 저는 눈치껏 먼저 들어가 쉴 테니, 오랜만에 만나신 두 분은 할 말이 많아 보여요.
올라가는 김에 천영이 씨 쓰실 방도 정리할게요.
 
최찬영:이따 봐.
 
여자는 두 사람을 두고 2층으로 향합니다.
 
최찬영:왜그래 자꾸?
 
천영이: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내가 ⋯싫어졌어?
 
최찬영:싫고 자시고, 10년 만에 찾아와서 한다는 소리가 그거야?
 
천영이:장난 그만해⋯⋯.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우리 같이 있었잖아. 내가 미치기라도 한 거야?
 
최찬영:며칠이 아니야. 벌써 10년이라고⋯ (비밀 속 타지에 은거하는 게 익숙해진 나머지, 진실을 꿰뚫는 자를 두려워하며 금세 망각의 영역으로 회피한다.) 네 어린 시절부터 잔존해왔던 정신병인지, 신의 농간인지 알 바 아니고. 나는 퍽 오래 살아온 나머지 너랑 같이 있던 시간이 찰나이자 치기 어린 시절의 질 나쁜 장난과 다를 게 없어.
구태여 덧붙이자면 기억 안 나. 하고 싶지도 않고. 영이야, 난 너랑 싸우기 싫어. 되도록이면 널 오래 좋아하고 싶으니까 협조 좀 해애···.
 
천영이:고작 그 정도의 감상이었으니까 버리는 게 그렇게 쉬웠구나. ⋯그래, 그랬겠다. (애정이 투절한 세월에 비해 곪아가는 환부에는 좀처럼 내성이 생기지 않는다. 각막에 물이 비친다.) ⋯⋯미안해. 내가 미쳤나 싶네. 네가 말한대로 어릴 적부터 앓아온 정신병이 도져서 오래 망상이라도 했나 싶어.
나는 널⋯⋯ 정말 많이 좋아하는데. 왜 네 앞에만 있으면 이렇게 초라해지고, 심장께가 아파오는지 모르겠다. ⋯불청객이었더라도 좀 봐줘. 나 여전히 머리가 나빠서 눈치도 조금 없어⋯⋯.
⋯⋯. 그간 잘 지냈어? (체념한다.)
 
최찬영:나라고 버리는 게 쉬운 줄 알아? 나는,ㅡ (알게 모르게 들떠 있던 숨이 빠르게 식어감을 감각한다. 혈관으로 혈액 대신 서리가 흐르는 느낌이다. 남몰래 힘주어 잡았던 옷깃을 정돈한다. 고작 두세 번 훑는다고 구깃한 잔상이 제대로 지워질 리 만무하다.) 됐다. 제대로 기억도 못 하는 애랑 무슨 대화를 해.
(무릇 갈등의 원인은 심각하거나 시답잖거나 양자 중 하나이다. 논쟁 이후 결국 피상적으로나마 화해하지만, 상대의 심지 방벽엔 열상을 남길지도 모른다. 번복한다. 남겼음에 확신한다.)
······그래. 허무하게 살고 싶지 않아서 결혼도 하고, 안정적이야. 네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안정적인 하루를 보냈겠지.
 
천영이:(비가 추적이는 바깥보다도 물에 젖은 공기가 느껴지고 그게 음성에 담겼다. 습기가 찼으며, 각막이 일렁인다.) ⋯한 번도 제대로 말해준 적 없었으면서⋯⋯. (그러나 그 중얼거림을 끝으로 갈등을 내포한 대화를 종결시킨다. 받은 상처에 허덕이는 티를 내기도 전에 모든 힘을 소진했음이 연유다.)
조금 기뻐. 일전의 말과는 모순되게 내가 완전히, ⋯아무 의미도 아닌 존재였다는 것 같지는 않아서. 또 짓궂게 굴어서 미안. 싸우자는 건 아니야. (호흡이 불안정하다. 채 갈무리하기도 전에 두서없는 말이 이어진다.) ⋯네가 힘들었을 때 그 여자가 옆에 있어줬다고 했지. 다행이야. 정말로⋯.
하루만 신세를 지고 돌아갈게. 앞으로 너 귀찮게 하는 일 없을 거야. 우연히라도⋯⋯.
 
최찬영:⋯⋯. (있잖아. 직진 일변도로 가던 방향이 어디까지 가야 그 길이 내가 가려던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줄 알아? 어디까지 갔을 때 사람은 심연을 가장하다 온전한 것을 발견하고 비로소 되돌아올 여지를 찾거나, 아님 되돌아올 길이 없어 그대로 다리 아래로 투신해 종지부를 찍는지. 너는 알아? 구두로 내뱉지 못할 말들이 영원히 구강을 맴돈다.)
나 먼저 들어가 볼게. 쉬어. 내일 보자.
 
익숙치 않은 방에서 잠드는 것은 얼마나 오래간만이었나요.
 
그탓에 잠을 설쳤을 수도,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새벽은 길기만 합니다.
 
꿈 속의 천영이는 왜인지 자의적으로 눈을 뜰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섭니다만,
 
이대로 잘까요.
 
아님 일어날까요?
 
천영이:(악몽 꿀 것 같아⋯ 비척비척 일어난다.)
 
눈을 뜹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빗소리가 점점 잦아들고 마을도 고요해집니다.
 
밖을 내다보면 어둠이 마을에 가득하네요.
 
그 어둠을 계속해서 쳐다보고 있으면 덩달아 기분이 이상해집니다.
 
번화한 마을이 아니니, 밤이 되면 어두운 것은 당연하지만…
 
이건 정도가 심하지 않나요?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도 달은 보이지 않고, 가로등 빛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천영이:
정신
기준치: 50/25/10
굴림: 90
판정결과: 실패
 
하지만, 천영이는 다시 잠에 들기로 합니다.
 
자고 일어나면 아침입니다.
 
비는 어느새 그쳤고, 밖은 쾌창합니다.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최찬영만 있고 여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식탁에는 이미 아침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최찬영:밥 먹고 할 거 있어?
 
특별히 할 것이 없다면 이대로 최찬영을 두고 돌아가거나,
 
최찬영의 고향이자 10년간 머물렀다고 주장하는 이 마을을 둘러볼 수 있습니다.
 
천영이:(자리에 앉는다.) ⋯근처에 더 있어도 안 불편해?
 
최찬영:별로. 이젠 신경 안 쓰려고.
 
천영이:그럼 구경 좀 하다가 갈게. 마지막이잖아.
 
최찬영:그래, 그럼⋯.
 
천영이는 문을 박차고 나갑니다.
 
닫힌 문 안쪽에선 외침이 들려오는데ㅡ
 
밖으로 나가면 마을의 전경이 보입니다.
 
내렸던 비 덕분인지 공기가 맑아 멀리까지 잘 보이네요.
 
천영이:(괜히 청개구리 심보 든다. ⋯광장부터 가야겠어. 발걸음 옮긴다.)
 
광장
 
마을 사람들이 한적하게 쉬고 있습니다.
 
담배를 피거나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는 등 평화로운 모습이네요.
 
봄옷을 입은 사람들은 근심과 걱정이 없어 보여요.
 
주민 모두가 각기 따로 행동한다는 점 외에 특별히 수상한 점은 없어 보입니다.
 
천영이:(자연히 어린 시절의 최찬영을 생각했다가 고개 젓는다. 주민들을 가까이 살필 수 있나?)
 
주민들을 자세히 훑자 직조된 존재처럼 울렁거린다.
 
천영이:(응⋯?)
(나 혹시 진짜 정신병자일까⋯. 눈 부비다가 외면한다. 특별한 점이 없으면 도서관으로 이동한다.)
 
천영이: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41
판정결과: 보통 성공
 
주민들의 수상한 점을 굳이 아내자면,
 
첫째로, 그 아무도 말이 없다는 것과
 
둘째로,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는 점이다.
 
도서관
 
마을에 단 하나 있는 도서관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입니다.
 
푸근한 인상의 사서 한 명이 조용히 카운터를 보고 있어요.
 
내부는 넓지 않지만 책을 읽을 만한 책상도, 책 종류도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네요.
 
천영이: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51
판정결과: 보통 성공
 
책들이 난잡하게 흩어져 있습니다.
 
사서가 제대로 일을 하지 않는 건지, 사람들이 죄다 뒤죽박죽으로 꽂아둔 건지.
 
문득 책 한 권이 눈에 밟히네요.
 
아랍 신화 서적입니다.
 
한 권을 집어들어 보면 자주 펼쳐본 자국이 남아있는 페이지를 발견합니다.
 
천영이:(인기 있는 페이지인가? 적당히 살피다가 덮는다. 도서관에 더 특별한 점은 없을까⋯.)
 
도서관에 있는 주민들마저 광장에 있던 주민들과 동일하게 주위가 일렁거린다.
 
외의 특이점은 없습니다.
 
천영이:(⋯전부 사람같지가 않네. ⋯⋯호수로 이동한다.)
 
호수
 
나무 다리가 중앙까지 이어져있는 호수입니다.
 
호수는 전체적으로 녹색 빛이 도는게, 별로 청결해 보이지는 않네요.
 
이곳까지 걸음하는 마을 사람들은 거의 희박한 것 같아요.
 
천영이:
정신
기준치: 50/25/10
굴림: 51
판정결과: 실패
 
더럽다.
 
말고의 감상은 없습니다.
 
천영이:더러워⋯. (근처에 쭈그려앉는다. 호수를 빤히 들여다본다 해도 특별한 점이 없나?)
 
천영이: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62
판정결과: 보통 성공
 
빤히...
 
물밑이 약간은 희미하게 빛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영이:(손을⋯⋯집어넣어 봐도 될까?)
 
호수는 매우 깊고, 더러워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천영이:(어떤 식으로 속 썩일까 고민하다가 그냥 돌아간다. 숲으로 향한다.)
 
 
어지러운 숲 사이에 사람들이 다니는 길입니다.
 
신기하게도 길이 중간에 끊겨 있습니다.
 
이렇게 드넓은 와중에 이정표 하나 없이 말입니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귀가하는 편이 좋을 것 같네요.
 
천영이:(여긴 특별히 뭐가 없을까? 신발로 흙 위를 질질 끈다. 없다면 돌아가자⋯.)
 
천영이는 집, 굳이 명명하자면 ‘남의’ 집에 당도합니다.
 
여자는 그새 돌아왔는지 최찬영과 함께 있는 모습입니다.
 
양민지: 아! 돌아오셨군요. 못본 새 돌아가신 줄 알았어요.
식사는 하셧나요? 때마침 준비 중이었는데 한 상 내어올게요!
 
천영이:(불청객이 된 기분이다. 괜히 미적거린다.) 저기, 그게에⋯⋯. 음, 감사해요⋯. 불편하지는 않으시죠?
 
양민지: 전혀요. (웃음) 불편할 게 뭐 있나요? 편히 쉬다 가세요.
 
그렇게 평화로이 흘러가는 듯 하였으나ㅡ
 
밖에서 문을 크게 두드리는 소리가 납니다.
 
최찬영이 일어나 밖을 나가보면,
 
마을 사람 한 명이 상처입은 사람을 부축하고 있습니다.
 
양민지: 산짐승··· 말인가요?
 
그 요청에 최찬영과 여자는 서로 마주보고 잠깐 표정을 굳힙니다.
 
양민지: 저, 죄송하지만 나중에 얘기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현관에 묻은 피는 두 분께서 닦아주시길 바라요.
 
여자는 급히 주민 두 사람을 데리고 진료소로 향합니다.
 
여자가 존재하지 않는 이 집 안은 침묵 뿐입니다.
 
최찬영:말했던가. 와이프가 진료소에서 일하거든.
 
천영이:아, 그래, 그랬구나⋯. (호칭에 꽂힌다.) 이런 일이 잦아? ⋯위험한 거 아니야?
 
최찬영:지금까지는 없었어. 주변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으니 산짐승이 나타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집에 머물까요?
 
뭣하면 여자를 따라 진료소로 향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천영이:(최찬영 소매 붙잡았다.) ⋯갈 거야?
 
최찬영:(붙잡힌 소매, 그리고 상대를 차례로 주시한다.) 뭣하면 같이 갈래?
 
천영이:피⋯도 닦아야 하고. ⋯여기에 있으면 안 돼? (조른다.)
 
최찬영:(천영이의 회목 그러쥔다. 불수의근의 맥동을 감각한다. 그런 손목을 지분거렸던가.) ⋯네 말대로 위험하잖아. 가뜩이나 시간도 늦었는데.
 
천영이:알잖아, 내 말은⋯⋯. (맥박이 과하게 뛰는 것 같은 착각.) 위험하니까. ⋯⋯미안. 같이 갈까?
 
최찬영:영이야.
 
천영이:⋯응?
 
최찬영:나 지금 나름대로 행복해. 근데 난 너도 행복했음 해. 돌아가도 내 걱정, 생각 같은 거 하지 말고.
가자.
 
둘은 여자가 이동한 진료소로 향합니다.
 
밤중엔 늘 꺼져있던 진료소의 불이 밝았고,
 
침대 위에 마을 사람 한 명이 누워있네요.
 
여자는 침착하게 응급치료를 마칩니다.
 
그리고 아무 문제 없을 거라며, 피도 멎었으니 하룻밤 푹 쉬면 될 거라 말합니다.
 
마을 사람 역시 감사의 인사를 건네며 집으로 귀가합니다.
 
양민지: 굳이 와주실 거라 생각도 못했어요. 걱정 많으셨죠. 괜찮아요.
여러모로 진료소 내부를 치워둬야 하는 부분이 있기에, 저는 오늘 여기서 숙식하도록 할 테니 두 분은 돌아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여기까지 걸음해주셨는데 미안하네요.
 
최찬영:괜찮겠어? 걱정돼서 그래.
 
양민지: 잘 알고 있잖아요. 제가 이곳에서 유일하게 할 줄 아는 일이에요.
이왕 손님이 오셨으니, 저보다는 손님을 챙기는 게 맞아요.
 
최찬영:그럼, 그냥 돌아갈게. 귀찮게 만들고 싶지는 않으니까. (천영이를 향해 턱짓한다.) 돌아가자.
 
천영이:(여자에게 고개 숙여서 인사한다. 토기가 올라오는 걸 애써 삼킨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집으로 돌아간 그는 당연하다는 듯 등을 돌린 채 각자의 방으로 돌아섭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집 안이 조용합니다.
 
거실에 나와보자, 간단한 아침 식사와 메모가 남아 있습니다.
 
주인이 없는 빈 집.
 
무언가를 살피기엔 적절할 것 같군요.
 
1층과 2층으로 구성된 주택입니다.
 
두 사람이 지내기에는 넓은 것 같네요.
 
천영이:(⋯거실부터 살핀다.)
 
거실
 
현관을 지나 바로 보이는 장소입니다.
 
천영이:(테이블 본다.)
 
테이블 위에는 포장된 과자가 담긴 트레이과 고루한 소설책이 몇 권, 재떨이가 있습니다.
 
천영이: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97
판정결과: 실패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두 눈 비비고 다시 도전해봅시다.
 
천영이:(눈비비적..)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29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헛것이 보였던 게 아닙니다.
 
과자 트레이 옆에 열쇠고리가 없는 작은 열쇠가 걸려 있네요.
 
챙길까요?
 
천영이:(양심에 찔리지만 우선 챙긴다. 이어 텔레비전 본다.)
 
텔레비전을 틀면 뉴스나 쇼 프로그램 등이 나옵니다.
 
천영이:
지능
기준치: 50/25/10
굴림: 76
판정결과: 실패
 
익숙한 프로그램이 나온다는 것 외로는,
 
글쎄요.
 
다시 봐도 모르겠습니다.
 
천영이:(모르겠다⋯ 서재로 들어간다.)
 
서재
 
쌍바라지 나무 문이 달려있는 서재입니다.
 
천영이:(책장부터 훑는다.)
 
주로 소설책이나 의학 서적과 만화책 위주로 꽂혀있는 책장입니다.
 
몇 개는 마을에 있는 도서관에서 구매하거나 빌려온 것 같네요.
 
천영이: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96
판정결과: 실패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같은 책이 몇 개고 꽂혀있습니다.
 
가짓수에 비해 책 종류는 몇개 되지 않는 듯 합니다.
 
천영이:(같은 책? ⋯살펴볼 수 있나?)
 
자세히 살펴보려 손을 뻗는 순간,
 
어딘가에 가로막힌 듯 사물에 닿을 수가 없습니다.
 
천영이:(여긴 참⋯ 이상해⋯⋯. 포기하고 책상 살핀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 좋은 높이의 나무 책상입니다.
 
필기구나 빈 종이 따위가 책상 위에 놓여있고 작은 수납함이 있습니다.
 
수납함을 열어보면 스무 장 정도 되는 종이 뭉치가 나옵니다.
 
스테이플러로 고정되어 있으며, 내용을 팔락이면 손글씨로 작성된 것 같네요.
 
오래되었는지 색이 바래고 조금 먼지가 묻어있습니다.
 
천영이:
지능
기준치: 50/25/10
굴림: 90
판정결과: 실패
 
글씨체를 유추해 보려 해도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천영이:(벅차네⋯. 더 특별한 점이 없다면 주방으로 향한다.)
 
주방
 
아일랜드 형식의 주방입니다.
 
천영이:(조리대부터 살핀다.)
 
인덕션이 2구 있는 조리대 입니다.
 
옆에는 싱크대가 붙어있으며,
 
신기하게도 조리도구 및 수저가 다 나무 재질입니다.
 
천영이:(음? ⋯이어서 찬장을 본다.)
 
찬장을 열어보면 조미료가 가득 들어있습니다.
 
허브나 향신료 병은 너무 많아 다 세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몇개는 라벨이 생략되어있어 알아보기 힘든것도 있습니다.
 
과연 정말 다 요리에 쓰이긴 하는 걸까요?
 
천영이:(매일 요리하는 것 같기는 했는데⋯. 음. 냉장고 열어본다.)
 
잘 정리된 냉장고는 최근에 들여놓은 식재료로 들어차있습니다.
 
특히 고기 종류가 많아보이네요.
 
각 부위별로 손질된 고기가 보관통에 들어있습니다
 
천영이:(최찬영이 좋아하는 것들일까? 가만 보다가 냉장고 닫는다. 창고로 간다.)
 
창고
 
주방 옆에 붙어있는 작은 문입니다.
 
식자재를 보관하지는 않는 것 같네요.
 
잠겨 있으며, 작은 열쇠 구멍이 있습니다.
 
천영이:(아까 얻은 열쇠를 사용할 수 있을까? 구멍에 끼워본다.)
 
열쇠를 끼워넣고 문을 열자 양 옆에 박스를 쌓는 다단 선반이 있습니다.
 
그 안쪽에는 철제 상자도 있네요.
 
천영이:(응? 선반부터 살펴본다.)
 
다단 선반에는 유리병에 들어간 알 수 없는 약재나 풀등이 가득합니다.
 
그 아래에는 풀 등을 건조시켜 가루로 만드는 기계가 있습니다.
 
천영이: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74
판정결과: 실패
 
뭐였더라?
 
머리를 써봅시다. 분명 낯이 익은데⋯
 
천영이:
지능
기준치: 50/25/10
굴림: 81
판정결과: 실패
 
천영이는 멍청합니다.
 
천영이:(멍청..)
 
하늘에서 계시가 내려옵니다.
 
생각해보니, 아까 서재의 책에서 봤던 풀들이네요.
 
환각과 최면을 유발하는···
 
천영이:(하늘에서 뭔가가 내려온다⋯⋯)
 
근데, 뭔가 수상하지 않나요?
 
분명 책을 읽지 못했는데 왜 낯이 익고, 책에서 봤다고 자연스레 인지하고 있는 것일까요?
 
천영이:(여기에 오고 나서부터 통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야⋯. 철제 상자를 살핀다.)
 
녹슨 철제 상자입니다.
 
들어보면 조금 묵직합니다.
 
열어보면 그 안은 이상할 정도로 깨끗하게 유지되어있습니다.
 
내부에 들어있는 것은 나사나 못 같은 공구입니다만,
 
그 사이에 유독 존재감을 내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끝이 뭉툭한 원뿔 형태로 생긴 도구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손잡이가 달려있으며,
 
원뿔의 끝에는 특이한 모양으로 튀어나온 돌기가 있습니다.
 
천영이:
지능
기준치: 50/25/10
굴림: 100
판정결과: 대실패
(멍청한얼굴..)
 
커다란 열쇠 같기도 하고,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이라 수상하기도 하고,
 
챙겨볼까요?
 
천영이:(일단 챙긴다.)
 
천영이:(부부침실⋯⋯에 간다.)
 
부부침실
 
현재 천영이가 머무르고 있는 손님방과 비슷하지만 그보단 더 큽니다.
 
천영이:(침대 살펴본다. 속이 안 좋다⋯⋯.)
 
부부가 사용하는 침대입니다.
 
지금은 잘 정돈되어 있네요.
 
천영이: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10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신기하게도 한쪽만 움푹 파여 사용감이 있습니다.
 
천영이:(어제 들어오지 않아서? ⋯괜히 시선 머물다가⋯ 협탁으로 고개 돌린다.)
 
수면등이 올려져있는 서랍이 있는 협탁입니다.
 
서랍을 열어보면 쓰지 않은 가죽 수첩이나, 라이터, 줄자나 맥가이버 칼과 같은 잡동사니가 나옵니다.
 
천영이: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72
판정결과: 실패
 
잡동사니 더미에서 무언가의 열쇠 꾸러미를 찾습니다.
 
어딘가의 스페어 키 같네요.
 
열쇠 두 개가 하나의 고리로 묶여있으며 크기는 서로 다릅니다.
 
뭔가 더 있나 싶으면서도, 주의력이 깊지 않아 협탁을 살피길 그만둡니다.
 
천영이:(음⋯⋯. 열쇠는 챙겨도 괜찮을까?)
 
챙겨도 됩니다. 야무지게 챙기세요.
 
천영이:(주머니에 넣는다. 이어 손님방으로 이동한다.)
 
손님방
 
싱글 베드 하나와 그 옆에 바로 붙어있는 협탁, 벽장과 창문으로 구성된 손님용 방입니다.
 
그간 사람이 머물지 않았는지 싸늘한 냉기와 빈 가구들이 그대로 보여지네요.
 
특별히 살필 건 없는 방입니다.
 
천영이:(미적거린다. 특별한 점이 없으면 작은 방으로 간다⋯.)
 
작은 방
 
수도 없이 많은 만화책들, 그리고 피규어들.
 
그냥 씹덕의 방···
 
이건 뭐죠.
 
천영이:(최찬영⋯?)
 
 
집 안을 아무리 누벼도 부부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진료소로 향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천영이:(마음이 불안하다. 진료소로 향한다.)
 
진료소로 향하자, 밖까지 안에서 나누는 소리가 들립니다.
 
큰 소리가 나는 것이 두 사람이 말싸움을 하는 듯 합니다.
 
가만 들어보면 아래와 같은 대화입니다.
 
양민지: 갑자기 왜 그래요?
 
최찬영:왜? 왜 같은 소리가 나와?
갑자기 왜 그러냐고 묻고 싶은 건 내 쪽이야. 상의도 없이 천영이는 왜 끌어들인 거야?
 
양민지: 그거야 바깥의 일이니 저도 몰라요. 그냥, 난 단지 당신이 좋아할 줄 알고 그랬어요. 당신 친구잖아요. 아니에요?
 
최찬영:···내가 지금껏 그런게 필요하다 했어? 애초에 걔는 친구도 뭣도 아니야. 쓸데없는 짓을 왜 벌리는데.
 
양민지: 찬영 씨, 알겠으니까ㅡ 일단 진정하세요.
 
최찬영:난 지금껏 너와의 시간을 만족했다고 느꼈어. 그건 고맙게 생각해. 근데, 그뿐이야. 이 이상 난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아.
 
양민지: 알겠어요. 근데 그게 제가 물리게 한 거예요? 당신 잘못이잖아요. 언제든 끝내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창고에 있는 키 가지고 호수로 가세요. 방법 알려줬잖아.
 
최찬영:그럼 천영이는?
 
양민지: 글쎄요. 그것 또한 당신이 신경쓸 바 아니죠.
 
최찬영:적당히 해.
 
문득, 천영이가 서있는 문 방향을 향해 커지는 발소리가 들립니다.
 
천영이:
민첩
기준치: 55/27/11
굴림: 38
판정결과: 보통 성공
 
재빨리 문에서 멀찍하게 떨어집니다.
 
운이 좋게도 엿들은 것과 같은 신세는 면했네요.
 
최찬영: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너, 오늘내일 중으로 돌아가.
 
천영이:⋯⋯너무 안 오길래.
(실토한다.) 싸웠어?
 
최찬영:그냥, 별거 아니야. 내말 듣고 있어? 너 이제 돌아가라고.
 
천영이:이제 신경 안 쓰겠다고 했잖아. ⋯귀찮게 안 할게.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야?
 
최찬영:가라고. 그냥, 제발⋯⋯. (구각 상승한다. 그와 반대되게 낯은 파리하게 질렸으므로 모순되는 얼굴이었다.) 한 번이라도 그냥 들어주는 적이 없어, 넌 왜애⋯⋯.
 
천영이:봐, 또 나만 바보로 만들고⋯⋯. 너야말로 내게 한 번을 설명해주는 법이 없어. (한 발 무른다.) 신경 쓰지 마. 우린 친구도 뭣도 아니니까 네 말 안 들어도 되는 거잖아⋯.
 
최찬영:영이야 말했잖아. 나 너 미워하기 싫어. 좀 도와주라. 내가 너 미워하지 않게. 내가 이렇게까지 염원한 적 없잖아.
일단 집으로 가자. 여기서 더 할 말도 아니고⋯.
 
천영이:⋯어차피 다시 안 볼 사이 아니야? 여기서 떠나고 나면. (무언가 더 쏟아내려다가 함구한다. 감정에 바스라지는 신체가 덧없게 느껴진다.)
그래, 그럼⋯.
 
최찬영은 등을 돌려 집으로 귀가합니다.
 
어깨 뒤로 얼핏 보이는 여자 또한 조금 난감한 표정이며,
 
자연스레 뒤를 따른 모양새가 됩니다.
 
이후로는 함께 고요하며 매슥거리는 식사 시간을 보냅니다.
 
어떤 메뉴를 준비했는지, 둘의 표정이 어떠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여자 또한 당신에게 짐을 챙길 것을 권합니다.
 
최찬영은 피곤하다며 이른 시간에 방으로 돌아섰고,
 
당신 또한 방으로 들어갑니다.
 
깜빡깜빡ㅡ,
 
이유 명확하게도 잠이 오지 않습니다.
 
어째서인가 진료소를 다시 방문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천영이:(진료소로 향한다. 발걸음이 무겁다.)
 
진료소는 단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작은 건물입니다.
 
들어가기 전 입구 옆에는 운영시간을 안내하는 팻말이 있네요.
 
낮까지만 문을 열어둔다 합니다.
 
굳게 잠겨있는 상태지만, 소지하고 있는 열쇠로 문을 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천영이:(안에 있을까? 열쇠를 사용해서 내부로 들어가고자 한다.)
 
안은 고요합니다.
 
소독약 냄새가 건물을 메우고,
 
누울 수 있는 간의 침대가 몇 구, 침대 사이사이 커튼이 쳐져 있습니다.
 
규모는 조금 큰 양호실 정도로 보입니다.
 
철제 트레이에 이런저런 약물들이 올려져 있으며,
 
복도 끝에 작은 문이 보입니다.
 
천영이:(침대에 특별한 점이 있나? 조심스럽게 살핀다.)
 
커튼을 열어젖히며 확인한 침대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천영이:(있을리가 없나⋯. 복도 끝에 작은 문 앞으로 간다.)
 
안으로 들어오면 개인 창고같은 공간입니다.
 
천영이:(⋯? 오른쪽 서랍을 확인한다.)
 
서랍
 
서랍을 열어보자, 가죽으로 된 수첩이 나옵니다.
 
열어보면 정갈한 글씨의 일기입니다.
 
10년 전부터 조금씩 메모하고 있던 것 같아요.
 
아래로 갈 수록 최근입니다.
 
천영이:(이건⋯⋯. 그 여자의 일기일까. 활자를 한참 쳐다보다가, 이어 종이 뭉치를 살핀다.)
 
끈을 풀어 종이를 읽어보면, 무언가 그림이 함께 있는 어떠한 장치에 대한 설명입니다.
 
천영이:(이게 다 뭐지? ⋯⋯. 더 특별한 점은 없나?)
 
별다른 특이점은 없습니다.
 
소지한 물품 중 '키'와 유사한 것이 있는 것 같아요.
 
천영이:
지능
기준치: 50/25/10
굴림: 41
판정결과: 보통 성공
 
갖고 있는 정보를 조합해 봅시다.
 
'키'는 이미 소지하고 있으며,
 
호수에는 절대 가지말라던 최찬영의 말과,
 
호수 아래서 빛나던 무언가.
 
모든 정황이 호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천영이:(곧바로 호수로 이동한다.)
 
새벽녘, 호수는 은은하게 녹색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새삼 어두운 밤중 가만히 바라보면 존재감을 드러내는 곳입니다.
 
천영이가 호수 근처로 들어서자, 깊은 곳에서 빛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깊고, 더러워도 안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천영이:(처음부터 네 말 들을 생각도 없었어⋯. 호수 안 쪽으로 들어간다.)
 
안으로 직접 들어가 보면, 호수 속은 밖에서 보는 것만큼 더럽지 않습니다.
 
잉어나 알 수 없는 물고기들이 몇 마리 돌아다니지만 그뿐입니다.
 
바닥까지 내려가 빛을 향해 가면 그곳에는 바닥에 파묻혀있는 기계 한 구가 있습니다.
 
기계 중앙, 원뿔 형태의 흠이 파여있네요.
 
천영이:(이곳에 꽂으라고 했던가? 키를 끼워 넣는다.)
 
가지고 있는 물건을 끼워 넣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만, 그것을 행하는 순간 많은 것이 바뀔 것이라는 직감이 듭니다.
 
이곳에 최찬영의 집 창고에서 발견한 ‘키’를 꽂으면,
 
장치들이 맞물리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달이 빨리 기울기 시작하며 주변에 있는 물고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수면이 조금씩 줄어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ㅡ,
 
호수에 돌 하나가 풍덩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위쪽을 바라보자, 수면 위로 한 명의 사람이 일렁입니다.
 
친히 호수에 발을 담가, 천영이와 시야를 공유하는 이는 최찬영입니다.
 
최찬영:슬슬 끝날 때가 됐다고 판단했어. 이쯤 살았으면 만족해.
 
천영이:⋯여전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나 머리가 나쁘단 말이야⋯⋯.
 
최찬영:(일생의 업이 야기하는 무거운 근심들과 부정적인 삶의 양상들을 다 제쳐두고 오로지 꾸밈 속에서 지내고 싶다는 요원한 바람이 일평생의 투사였으나, 세상사 원하는 대로 되는 경우 드물고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너무 많다. 생로병사의 굴레 속에서 인간은 예외 없이 무력하다. 언제까지고 함께하고 싶다는 소망은 나 홀로 노력한다고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생명은 붙잡는다고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있잖아. 그간 한 번도 말해주지 않았던 것 같아서.
······사랑해.
내가 너를 사랑해서 미안해.
 
천영이:(소통의 부재. 명석하지 못한 뇌 굴려봤자 달라질 거 없다지만 눈칫밥으로 자란지가 평생인데, 고작 그 말 한 마디로 이별을 예감했다. 가끔은 침묵에 일조하는 것이 가장 큰 대답이 되기도 하나. 한 순간의 쓸림에 가차없이 무너진다. 어두운 낯이 익사의 경로를 헤매는 심해어나 다를 것 없을 말로의 지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물 속에 있어서 그런가. 숨이 막힌다.) 싫어. ⋯또 떠나려는 거지?
⋯⋯내가 그렇게 미워?
네 변덕에 어디까지 맞춰줘야 해, 내가⋯.
그렇게 영영 떠날 것 처럼 말하지마. 있잖아, 나 진짜 괜찮아. ⋯⋯네가 다른 사람이랑 행복해도⋯.
 
최찬영:(특별과 우선. 치기 어린 시절 강행했던 약속. 당장의 일처럼 생경하다. 그러나 그것들을 반추하며 박탈감이나 괴리감 따위를 적립할 여유에 빠질 처지가 아니었다. 살아 있는 대부분이 각자가 서 있는 자리에서 정주 불가능하다는 걸 너무 빨리 깨달았기에, 당장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말을 하려 한다.) 그래. 사실, 네가 너무 많이 미웠어. 구두로만 전하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난 죽고 싶다는 말을 수도 없이 뱉었지만, 그간 실행하지 못했잖아.
버린다고 했던 것도 마찬가지야. 내가, 언제, 너를 내쳐버린 적이 있어. 나한테 넌 너무 어려워···. 단 한 번도 쉬웠던 적이 없어. (시선은 방향성과 목표점을 잃은 채 사방으로 튀고, 과잉이 야기하는 불안을 발화한다.)
일종의 복수 같은 거지. 언젠가 되갚아주고 싶었어. 애써 괜찮은 척하지 마. 나는 네가 괜찮지 않은 모습을 보고 싶었으니까.
 
천영이:(산소를 통해 호흡을 바탕으로 하는 유기체였기 때문에 감정을 달래기 위해 심호흡을 지속적으로 행하느라 몸이 떨렸다. 또 다시 각막에 물기가 서린다. 온전히 추락하지도 못하는 자태마저도 이도저도 아닌 목숨을 대신하는 것 같다.) ⋯차라리 그렇게 말해주지 그랬어, 진작에. 그랬으면 나도⋯⋯. (파동이 서로 다른 매질의 경계면을 지나며 굴절된다. 음성이 먹혀들어간다. 제대로 전해지는 것이 없다.)
두고 갔잖아! 더는 지겹다면서 나를 두고, ⋯좋을대로 회피하고⋯⋯. 너야말로 난제야. 나는 네가 제일 어려워, 아직도⋯.
다 알고 있었으면서⋯⋯. (쏘아본다. 비탄에 잠겨서 할애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은 것도 짐작하고 있는 사실이다. 발화를 공유하기엔 너무 지쳤다. 이미 젖어버린 소매로 눈가를 벅벅 닦아봤자 의미없는 짓인 것도, 안다.) 잘 됐다. 제대로 복수했네. 내가 졌어⋯.
사랑해, ⋯⋯.
너 때문에 내 인생은 엉망이야⋯.
 
최찬영:두고 가지 못했잖아. 종래엔 너한테 휘둘렸잖아아⋯⋯.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부모도, 다른 누구도 이렇게까지 침잠시키지 못했는데 네가, 너만 날 비참하게 만들어⋯. (현 상황에서 당장 할 수 있는 걸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해결책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수긍하는 것. 둘째, 그것이 어쩌면 불가결한 추동력이라 승인하는 것.)
(사람은 잘못으로부터 배운다고들 한다. 이 말의 참 거짓을 분리하자면 반쯤은 맞고 남은 반쯤은 틀리다 확언할 수 있으리라. 분명히 상흔을 남긴 사건에서 교훈을 얻어, 착오를 거듭하지 않기 위해 결핍된 요소를 인지하고 수정하며 발달시키는 대신, 나는 도무지 교정하거나 개선할 수 없는 내 천성이자 본성임을 상기한다.)
그러니까, 너 또한 내게 엇비슷한 감상을 느낀다면 내가 인간으로 남을 수 있게ㅡ 내 인간성을 존중해.
영이야. 비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는데, 난 내세에도 널 만났으면 해.
그러니까 또 보는 걸로 하자.
 
그 말을 끝으로 세상은 온통 검게 물들고,
 
정신은 어디론가 유영하는 느낌이 듭니다.
 
어느워진 시야 속에서 기억을 하나 돌려받습니다.
 
왜 이제껏 착각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온전한 기억이 머리속을 강타합니다.
 
당신은 비가 내리는 날 최찬영을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
 
마을에 당도했으나 찾지 못했고,
 
그러던 중 멀리 보이는 연기 하나를 찾아 이 동굴까지 왔다가ㅡ
 
여자를 만났습니다.
 
찾는 사람이 최찬영이라는 것을 알게 된 여자는 당신을 어디론가 데려갔고,
 
그 뒤로는
 
 
아.
 
옅은 빗소리와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뜹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이곳은 동굴이고,
 
동굴 벽면에 기대 잠이 들었던 것을 알게 됩니다.
 
바닥에 깔린 시트에 최찬영이 누워있으며,
 
당신을 흔들어 깨우던 사람은 여자입니다.
 
양민지: 드디어 기계 작동이 정지되었네요. 정신이 들어요?
 
천영이:(몸 일으키자마자 반사적으로 최찬영 살폈다. 불안한 시선 처리. 여자를 쳐다본다.)
 
현재 천영이가 자리한 곳은 축축한 동굴입니다.
 
깊숙한 곳에서 좋지 않은 연기가 흘러나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동굴입니다.
 
천영이가 누워있던 곳을 기점으로 오른쪽 구멍은 안이 너무 깊어 보이지 않으며,
 
왼쪽으로는 나가는 구멍이 보입니다.
 
밖은 구슬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최찬영은 어딘가 괴로운 듯 찡그리고 있습니다.
 
손을 대어보면 체온은 데일 듯 뜨겁고 연신 식은땀을 흘립니다.
 
양민지: 궁금한 게 많은 표정이에요.
 
천영이:(입을 달싹거린다.) 다른 건 괜찮으니까. ⋯찬영이는, 최찬영은 이제 어떻게⋯⋯.
 
양민지: 찬영 씨는 몇시간 뒤에 완전한 식신귀로 변이될 거예요. 그 즉시 저는 그를 사살할 겁니다.
지금까지의 시간은 그가 유복한 삶을 보낼 수 있도록, 나아가 삶을 정리할 수 있도록 도움준 거 뿐이에요.
덧붙여 천영이씨는 당도하지 못할 미래까지 엿보게 해줬으니 말이죠.
 
천영이:사, 사살이요? ⋯⋯. (이도저도 못하고 안절부절거린다. 낯짝에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럼 전 이제, 어떻게 해야⋯⋯. (타개책을 제시해주길 조르는 꼴이 미성년이나 다름이 없다.)
 
양민지: 환각은 어떠셨나요?
그의 모습은요?
대화는 좀 나누셨을까요?
 
천영이:⋯⋯그럼 그게 다⋯⋯. (표정이 무너진다. 마침내⋯.)
 
여자는 고개를 기울입니다.
 
양민지: 그래서 기회를 드리려 해요.
제가 아닌, 굳이 그를 위해 먼길 와주신 천영이 씨를 위해 권한을 넘겨드릴게요.
두 사람의 관계를 존중합니다. 그렇기에 종결을 맺을 사람은 당신이겠죠.
 
그렇게 말하며 여자는 앞에 소총 한 자루를 내려둡니다.
 
제 앞에 놓여진 사물을 응시하면, 천영이는 확신합니다.
 
최찬영의 죽음은 되돌릴 수 없고ㅡ
 
산송장이 된 그의 마지막을 여자 혹은 자신이 장식해 줘야 한다는 것을요.
 
양민지: 물론, 그를 데리고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불허합니다.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라요.
 
천영이:(앞에 놓인 소총을 떨리는 손으로 쥔다. 혼자만 동떨어진 듯한 이 낯선 세계에서는 약속된 구원이 있을리가 없다. 심연의 깊이를 측량할 길이 없다.) ⋯⋯대신 하나만 부탁해도 ⋯괜찮아요?
 
양민지: 무엇일까요?
 
천영이:책에서 봤는데, 식시귀는 손톱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태워버리는 게 좋다면서요⋯⋯. (최찬영 두부 쪽으로 겨냥한다.) 후에 저도 같이 태워주세요. 흔적 하나 없이, 모조리⋯.
 
양민지: 어려운 일은 아니죠. 하지만 정녕 그게 당신이 바라는 일인 건가요? 반대로, 찬영 씨 또한 바라는 일일까요?
 
천영이:흐흐. ⋯⋯걔가 절 내세에서 보기를 바란다 했어요. 시기는 적당히 맞춰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겨냥한 손에 힘을 푼다. 균열이 재관측되어 모든 것이 평등하게 사멸 앞에 놓인다면, 덜 억울하지 않을까 해서⋯.)
감사해요. (⋯각막에 물이 비친다. 삶이 아니라 우울을 투영한다. 총성이 울릴 때는 눈을 질끈 감고 헛숨을 들이킨 것도 같다. 현재의 감상이 더 이상 중요하지는 않다.)
 
당신은 여자의 양보를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그것을 손에 쥐면, 최찬영이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그의 말을 따르려 합니다.
 
여러 의미를 담아, 상대가 아닌 자신을 위로하며.
 
총성이 동굴 안을 울립니다.
 
등 뒤로는 여자가 존재합니다.
 
뒤이어 따르는 한 발의 총성.
 
주변이 조용해지면 빗소리만이 귓가를 메웁니다.
 
여자는 짧게 묵념하곤 나갈 채비를 합니다.
 
최찬영과 천영이의 시신은 여자의 도움을 받아 화장되었습니다.
 
사인은 의문사.
 
곧이어 생전에 그들이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 함께 조촐한 장례를 열 예정입니다.
 
장례가 잘 진행됐는지,
 
그 장례에 조문이 오긴했는지, 알 수 없는 채로ㅡ
 
비는 더이상 내리지 않습니다.
 
화장하지는 않으나 봄임은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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