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이:(요지부동이다. 발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이해가⋯. ⋯⋯설명 좀 해.
최찬영:뭐가?
양민지: 비를 많이 맞으셔서 그런가··· 어디 아프세요?
이러나 저러나 최찬영 일동은 그러한 천영이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입니다.
최찬영:밥은 먹었나? 나이를 먹긴 했나 봐. 나도 이제 요리가 늘긴 했어.
먼 길까지 왔는데 끼니라도 제대로 챙겨 먹어야지. 뭣하면 식사 준비할 때까지 씻고 와도 돼. 옷 정도는 빌려줄 테니까.
천영이:전혀 대화가 안되는 기분이야. 내가 기억을 상실하기라도 했나? 아니면 또, ⋯⋯내 머리가 나빠서⋯. (수벽에 잔류하는 체온조차 차게 식어가는 감각이 일었다. 타개 방안을 찾기 위해 입을 달싹이는 시도가 있었으나, 이내 함구한다.)
(⋯미처 우산으로 막지 못했던 빗물이 발목을 타고 바닥으로 뚝 떨어진다.) 최찬영.
나한테 화난 거 아니지?
최찬영:나도 비슷한 감상이야. (눈앞의 상대의 혼란을 이해할 방도 따윈 없다. 떨어지는 빗물을 응망한다. 장시간의 침묵. 현관 안 협탁에 쌓아진 옷가지들을 우악스럽게 품에 안긴다.) 나는 화가 나지 않았고, 네가 내게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어. 씻고 와. 욕실은 왼쪽 귀퉁에 돌면 바로 있어.
천영이:(별 다른 저항 없이 옷가지들을 받는다. 꿈을 꾸는 것이라고 착각할 만큼 현실성이 없다. 천천히 욕실 쪽을 향해 몸을 돌린다. 발걸음을 떼기까지 몇 초.) 아까 그 여자 말이야. ⋯⋯사랑해?
최찬영:글쎄⋯⋯ 아마 그런 거겠지. 살면서 사랑이란 거 수도 없이 정의하면서 살아오잖아. 태어나 당연히 엄마, 아빠. 학교 갈 무렵엔 선생님과 친구들. 대가리 크면 여자친구, 남자친구. (목소리는 격양되지 않고 숫제 덤덤했다.) 인연법에 의거해서 사람 만날 때마다 그 관계가 무엇이든 사랑은 이런 거다, 정의하기 바쁘지. 그렇다면 난 저 여자를 사랑하는 게 맞아.
젖은 채로 방치하면 감기 걸려. 회포는 나중에 풀고 샤워부터 해.
천영이:그랬구나.
⋯네 다정한 목소리를 들어보는 건 간만이라. (달칵. 그 말을 끝으로 욕실 안에 들어가 문을 닫는다.)
ㅡ
짧은 목욕을 하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나요?
천영이:(무슨 정신으로 샤워기나 제대로 잡았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들려준 옷으로 대강 갈아입고 나온다.)
천영이가 씻고 나오면, 주방에서는 상기된 듯한 대화가 얼핏 들립니다.
양민지: 그래도, 찬영 씨 입맛이 달라져서 다행이에요. 거진 10년 전까지만 해도 제가 만드는 음식은 아예 먹지 않으려 했잖아요.
최찬영:그때야 뭐······ 음식을 가려서 그렇지. 지금은 네가 만드는 음식이 아니면 안 되기도 하고.
누군가 애정을 담아 만들어주는 음식이 맛 없을 리 없잖아.
양민지: 후후! 말만이라도 영광이네요.
뒤늦게서야 천영이의 등장을 알아차린 두 사람은 짧게 시선을 교환하고,
적당히 넓은 식탁 위로 안내합니다.
식탁 위에는 로스트 비프와 매쉬드 포테이토, 버터를 발라 굽고 치즈를 뿌린 옥수수 등이 차려져 있습니다.
평소에 보던 것과는 제법 대른 모양새에요.
최찬영:와서 먹어.
천영이:(말없이 의자를 끌어 최찬영 맞은편에 앉는다.) ⋯⋯와, 이걸 다 직접 만드셨어요?
양민지: 간만에 손님이 오셔서 실력 발휘를 좀 했죠. 입에 맞으실까 모르겠네요. (먹기까지 얌전히 기다린다.)
천영이:⋯온다고 연락한 적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아셨어요? (속이 울렁거려서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묘하게 몸을 돌려 최찬영과의 마찰을 피한다.)
양민지: 음, 그건 비밀이랍니다. 다 알려드리면 재미없겠죠?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 천영이를 향해 입 연다.) 두 분은 친구인 건가요? 그이를 찾아오는 사람은 천영이 씨밖에 없어 의외라서요. 꽤 먼 길이잖아요.
천영이:(모든 혈관이 역류할 정도로 박동이 거세지는 것 같다. 미어질 동맥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그랬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요. (포크만 그릇 위에서 휘적거린다.) 찬영아, 우리 친구였던가?
최찬영:(굳은 표정 여과 없이 드러났지만 바로 표정을 갈무리하고 입꼬리를 말아올린다.) 아마도? 교우, 급우, 동창⋯ 나아가 생사결을 함께한 전우? 그런 거였지.
양민지: 아, 들었던 것 같아요. 두 분 모두 고된 학창 시절을 보냈다는 거 말이에요. 안부가 궁금해서 찾아오셨지요?
그렇다면 간략하게나마 설명해 드리는 것이 맞을 것 같아서요. (최찬영의 동의를 구하듯 눈짓한다.)
최찬영:알아서 해.
여자는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양민지: 저희는 10년 전 쯤 처음 만났어요. 찬영 씨가 이 마을에 자리 잡을 때까지 제가 옆에서 많은 일을 보필했죠.
당시 찬영 씨는 위태로워서 제가 옆에서 간병했어요. 그때부터 사이가 발전해서, 몇 해전에 결혼했답니다.
천영이:(횡경막의 무의식적인 수축과 경련이 잠시 일었다. 반사적으로 제 입을 막고 콜록거린다.) ⋯결혼이요?
최찬영은 당장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우리집에⋯⋯. (대화가 빙빙 돈다. 측량할 수 없는 심연으로 추락하는 것만 같다.) 저기, 둘이서 저를 놀리고 있는 건 아니시죠. 찬영이가 제 욕 많이 했어요?
⋯이제 지겨우니까 장단을 맞춰달라고⋯⋯.
최찬영:그만. 결혼한 거 맞아. 시답지 않은 소리 할 거면 와이프 올라가고 나서 해. 자고 갈 거지? (여자를 향해 턱짓한다.) 2층에 손님방 정리 해놨어?
양민지: 제법 흥미로운 얘기들이네요. (여전히 미소 지은 채 고개 주억거린다.) 저는 눈치껏 먼저 들어가 쉴 테니, 오랜만에 만나신 두 분은 할 말이 많아 보여요.
올라가는 김에 천영이 씨 쓰실 방도 정리할게요.
최찬영:이따 봐.
여자는 두 사람을 두고 2층으로 향합니다.
최찬영:왜그래 자꾸?
천영이: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내가 ⋯싫어졌어?
최찬영:싫고 자시고, 10년 만에 찾아와서 한다는 소리가 그거야?
천영이:장난 그만해⋯⋯.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우리 같이 있었잖아. 내가 미치기라도 한 거야?
최찬영:며칠이 아니야. 벌써 10년이라고⋯ (비밀 속 타지에 은거하는 게 익숙해진 나머지, 진실을 꿰뚫는 자를 두려워하며 금세 망각의 영역으로 회피한다.) 네 어린 시절부터 잔존해왔던 정신병인지, 신의 농간인지 알 바 아니고. 나는 퍽 오래 살아온 나머지 너랑 같이 있던 시간이 찰나이자 치기 어린 시절의 질 나쁜 장난과 다를 게 없어.
구태여 덧붙이자면 기억 안 나. 하고 싶지도 않고. 영이야, 난 너랑 싸우기 싫어. 되도록이면 널 오래 좋아하고 싶으니까 협조 좀 해애···.
천영이:고작 그 정도의 감상이었으니까 버리는 게 그렇게 쉬웠구나. ⋯그래, 그랬겠다. (애정이 투절한 세월에 비해 곪아가는 환부에는 좀처럼 내성이 생기지 않는다. 각막에 물이 비친다.) ⋯⋯미안해. 내가 미쳤나 싶네. 네가 말한대로 어릴 적부터 앓아온 정신병이 도져서 오래 망상이라도 했나 싶어.
나는 널⋯⋯ 정말 많이 좋아하는데. 왜 네 앞에만 있으면 이렇게 초라해지고, 심장께가 아파오는지 모르겠다. ⋯불청객이었더라도 좀 봐줘. 나 여전히 머리가 나빠서 눈치도 조금 없어⋯⋯.
⋯⋯. 그간 잘 지냈어? (체념한다.)
최찬영:나라고 버리는 게 쉬운 줄 알아? 나는,ㅡ (알게 모르게 들떠 있던 숨이 빠르게 식어감을 감각한다. 혈관으로 혈액 대신 서리가 흐르는 느낌이다. 남몰래 힘주어 잡았던 옷깃을 정돈한다. 고작 두세 번 훑는다고 구깃한 잔상이 제대로 지워질 리 만무하다.) 됐다. 제대로 기억도 못 하는 애랑 무슨 대화를 해.
(무릇 갈등의 원인은 심각하거나 시답잖거나 양자 중 하나이다. 논쟁 이후 결국 피상적으로나마 화해하지만, 상대의 심지 방벽엔 열상을 남길지도 모른다. 번복한다. 남겼음에 확신한다.)
······그래. 허무하게 살고 싶지 않아서 결혼도 하고, 안정적이야. 네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안정적인 하루를 보냈겠지.
천영이:(비가 추적이는 바깥보다도 물에 젖은 공기가 느껴지고 그게 음성에 담겼다. 습기가 찼으며, 각막이 일렁인다.) ⋯한 번도 제대로 말해준 적 없었으면서⋯⋯. (그러나 그 중얼거림을 끝으로 갈등을 내포한 대화를 종결시킨다. 받은 상처에 허덕이는 티를 내기도 전에 모든 힘을 소진했음이 연유다.)
조금 기뻐. 일전의 말과는 모순되게 내가 완전히, ⋯아무 의미도 아닌 존재였다는 것 같지는 않아서. 또 짓궂게 굴어서 미안. 싸우자는 건 아니야. (호흡이 불안정하다. 채 갈무리하기도 전에 두서없는 말이 이어진다.) ⋯네가 힘들었을 때 그 여자가 옆에 있어줬다고 했지. 다행이야. 정말로⋯.
하루만 신세를 지고 돌아갈게. 앞으로 너 귀찮게 하는 일 없을 거야. 우연히라도⋯⋯.
최찬영:⋯⋯. (있잖아. 직진 일변도로 가던 방향이 어디까지 가야 그 길이 내가 가려던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줄 알아? 어디까지 갔을 때 사람은 심연을 가장하다 온전한 것을 발견하고 비로소 되돌아올 여지를 찾거나, 아님 되돌아올 길이 없어 그대로 다리 아래로 투신해 종지부를 찍는지. 너는 알아? 구두로 내뱉지 못할 말들이 영원히 구강을 맴돈다.)
최찬영:(일생의 업이 야기하는 무거운 근심들과 부정적인 삶의 양상들을 다 제쳐두고 오로지 꾸밈 속에서 지내고 싶다는 요원한 바람이 일평생의 투사였으나, 세상사 원하는 대로 되는 경우 드물고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너무 많다. 생로병사의 굴레 속에서 인간은 예외 없이 무력하다. 언제까지고 함께하고 싶다는 소망은 나 홀로 노력한다고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생명은 붙잡는다고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있잖아. 그간 한 번도 말해주지 않았던 것 같아서.
······사랑해.
내가 너를 사랑해서 미안해.
천영이:(소통의 부재. 명석하지 못한 뇌 굴려봤자 달라질 거 없다지만 눈칫밥으로 자란지가 평생인데, 고작 그 말 한 마디로 이별을 예감했다. 가끔은 침묵에 일조하는 것이 가장 큰 대답이 되기도 하나. 한 순간의 쓸림에 가차없이 무너진다. 어두운 낯이 익사의 경로를 헤매는 심해어나 다를 것 없을 말로의 지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물 속에 있어서 그런가. 숨이 막힌다.) 싫어. ⋯또 떠나려는 거지?
⋯⋯내가 그렇게 미워?
네 변덕에 어디까지 맞춰줘야 해, 내가⋯.
그렇게 영영 떠날 것 처럼 말하지마. 있잖아, 나 진짜 괜찮아. ⋯⋯네가 다른 사람이랑 행복해도⋯.
최찬영:(특별과 우선. 치기 어린 시절 강행했던 약속. 당장의 일처럼 생경하다. 그러나 그것들을 반추하며 박탈감이나 괴리감 따위를 적립할 여유에 빠질 처지가 아니었다. 살아 있는 대부분이 각자가 서 있는 자리에서 정주 불가능하다는 걸 너무 빨리 깨달았기에, 당장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말을 하려 한다.) 그래. 사실, 네가 너무 많이 미웠어. 구두로만 전하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난 죽고 싶다는 말을 수도 없이 뱉었지만, 그간 실행하지 못했잖아.
버린다고 했던 것도 마찬가지야. 내가, 언제, 너를 내쳐버린 적이 있어. 나한테 넌 너무 어려워···. 단 한 번도 쉬웠던 적이 없어. (시선은 방향성과 목표점을 잃은 채 사방으로 튀고, 과잉이 야기하는 불안을 발화한다.)
일종의 복수 같은 거지. 언젠가 되갚아주고 싶었어. 애써 괜찮은 척하지 마. 나는 네가 괜찮지 않은 모습을 보고 싶었으니까.
천영이:(산소를 통해 호흡을 바탕으로 하는 유기체였기 때문에 감정을 달래기 위해 심호흡을 지속적으로 행하느라 몸이 떨렸다. 또 다시 각막에 물기가 서린다. 온전히 추락하지도 못하는 자태마저도 이도저도 아닌 목숨을 대신하는 것 같다.) ⋯차라리 그렇게 말해주지 그랬어, 진작에. 그랬으면 나도⋯⋯. (파동이 서로 다른 매질의 경계면을 지나며 굴절된다. 음성이 먹혀들어간다. 제대로 전해지는 것이 없다.)
두고 갔잖아! 더는 지겹다면서 나를 두고, ⋯좋을대로 회피하고⋯⋯. 너야말로 난제야. 나는 네가 제일 어려워, 아직도⋯.
다 알고 있었으면서⋯⋯. (쏘아본다. 비탄에 잠겨서 할애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은 것도 짐작하고 있는 사실이다. 발화를 공유하기엔 너무 지쳤다. 이미 젖어버린 소매로 눈가를 벅벅 닦아봤자 의미없는 짓인 것도, 안다.) 잘 됐다. 제대로 복수했네. 내가 졌어⋯.
사랑해, ⋯⋯.
너 때문에 내 인생은 엉망이야⋯.
최찬영:두고 가지 못했잖아. 종래엔 너한테 휘둘렸잖아아⋯⋯.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부모도, 다른 누구도 이렇게까지 침잠시키지 못했는데 네가, 너만 날 비참하게 만들어⋯. (현 상황에서 당장 할 수 있는 걸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해결책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수긍하는 것. 둘째, 그것이 어쩌면 불가결한 추동력이라 승인하는 것.)
(사람은 잘못으로부터 배운다고들 한다. 이 말의 참 거짓을 분리하자면 반쯤은 맞고 남은 반쯤은 틀리다 확언할 수 있으리라. 분명히 상흔을 남긴 사건에서 교훈을 얻어, 착오를 거듭하지 않기 위해 결핍된 요소를 인지하고 수정하며 발달시키는 대신, 나는 도무지 교정하거나 개선할 수 없는 내 천성이자 본성임을 상기한다.)
그러니까, 너 또한 내게 엇비슷한 감상을 느낀다면 내가 인간으로 남을 수 있게ㅡ 내 인간성을 존중해.